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은 일반인을 위한 인문교양서 저자로도 유명한데 대표작으로 ‘발견자들’과 ‘창조자들’이 있다. 과학자들은 예상할 수 있듯이 ‘발견자들’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예술가들은 ‘창조자들’에서 다루고 있다. 이처럼 과학자들은 자연 현상에서 법칙이나 원리를 발견하는 사람들이지만 예외가 있으니 바로 새로운 분자를 합성하는 화학자들이다. 실제로 이런 화학자들 가운데는 자신을 과학자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1977부터 복용해온 진통제 1970년대 초 독일 제약회사 그뤼넨탈의 화학자들은 모르핀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진통제를 만들었다. 양귀비에 존재하는 천연 약물인 모르핀은 진통 효과는 탁월하지만 마약이라 중독이란 부작용이 크므로 약효는 유지하되 부작용은 적은 새로운 약물을 개발하게 된 것. 이들이 만든 분자 트라마돌(tramadol)은 임상시험을 거쳐 1977년 출시됐고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데 화학분야 학술지 ‘앙게반테 케미’ 최신호에 놀라운 ‘발견’이 실렸다. 40여 년 전 화학자들이 ‘창조’한 분자인 트라마돌이 사실은 아프리카에 자생하는 바늘방석나무(pincushion tree, 학명은Nauclea latifolia)의 뿌리껍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조셉푸리에대 그레노블신경과학연구소 미셸 드바르드 교수팀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사람들이 민간요법으로 이용해온 바늘방석나무 뿌리의 약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뜻밖의 발견을 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바늘방석나무 뿌리를 진통제나 해열제, 항말라리아제, 항염증제 등 다양한 용도로 쓰고 있다. 연구자들은 뿌리껍질에서 진통제 성분을 찾기 위해 추출물을 분리했다. 그리고 진통제 활성을 갖는 부분을 정제해 NMR(핵자기공명), X선결정법 등으로 구조를 밝혔는데 알고 보니 바로 트라마돌이었다는 것. 결국 바늘방석나무 뿌리가 진통 효과가 뛰어나다는 현지 사람들의 주장은 100% 사실이었던 셈이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트라마돌 정도 크기의 분자(분자식이 C16H26NO2), 즉 탄소원자 16개, 수소원자 26개, 질소원자 1개, 산소원자 2개가 만들 수 있는 조합은 사실상 무한하다. 그런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화학자들이 선택한(만든) 구조가 자연 상태에 이미 존재한다는 건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보다도 훨씬 낮다. 지금까지 화학자들이 합성한 분자 가운데 자연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뒤늦게 밝혀진 사례는 이번 경우를 포함해 세 차례뿐이라고 한다. 즉 신경안정제인 벤조디아제펜(benzodiazepine)이 식물에 미량 들어있다는 사실이 1990년대 초 밝혀졌고, 항암제인 불화우라실(fluorouracil)이 해면 한 종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2003년 보고됐다. 그러나 약리적으로 효과를 보일 정도의 양이 천연에 존재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트라마돌의 존재가 ‘창조’에서 ‘발견’으로 바뀐 건 물론 사람의 관점에서다. 바늘방석나무 입장에서 보면 트라마돌은 이미 오래전에 자기들이 창조한 분자로 당연히 사람보다 우선권이 있다. 그렇다면 바늘방석나무는 왜 트라마돌을 만들었을까. 논문에 그에 대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즉 양귀비가 모르핀을 만들어 해충에 저항하듯이(신경을 교란시켜서), 바늘방석나무도 비슷한 목적으로 트라마돌을 고안해 냈을 것이다. 뉴스로 이번 연구결과에 대해 알게 된 필자는 교신저자인 미셸 드바르드 교수에서 논문 파일을 요청해 받았다. 그냥 고맙다고 답하기는 뭐해서 “아주 흥미로운 논문이었다. 사실 내 전공이 화학”이라고 덧붙여 보냈는데, 뜻밖에 답이 왔다. 당연히 저자도 화학자일 것으로 생각하고 소속을 자세히 안 봤는데 아니었다. “난 화학자가 아니지만 화학을 사랑합니다. 생물학과 함께 하면 화학은 아주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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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사이언스타임즈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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